요즘 들어 다양한 컨설팅 회사에서 종종 나를 찾아온다. 내가 하는 일이 회사의 전략수립과 관계된 일이다 보니, 크고 작은 컨설팅 관련 회사들이 나와 안면을 트고 싶어 하는 것이다. 보통은 30분 정도만 시간을 달라고 요청하는데, 회사의 대표나 임원급이 오기도 하고 기업고객을 전담 관리하는 직원이 오기도 한다. 그런데 최근에 출장이 다소 뜸해진 틈을 타서, 이런 미팅을 연달아 몇 번 가지면서 재미있는 관찰을 할 수가 있었다.

처음 만나면 대개 자기 소개를 하면서 명함을 내민다. 그리고는 사무실이 어디에 있냐, 찾아오는 길이 어땠냐 등등 가벼운 소재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여기까지는 아주 자연스럽다. 그 다음에 본격적으로 찾아온 목적, 즉 회사 소개를 시작하는데 여기서부터 차이가 난다. 어떤 미팅에선 내가 계속 귀기울여 듣고 질문도 하는 반면에, 많은 경우에는 시작한 지 단 몇 분 만에 내가 흥미를 잃고 ‘이 사람들 언제 돌아갈건가’를 생각하는 것이다. 왜 그럴까? 생각해보니 대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이런 미팅도 일종의 ‘영업’인데, 많은 사람들이 영업의 기본을 따르지 않는 것이다.

내가 비록 영업에 경험이 아주 많은 것은 아니지만, 나름 미국에서 제약회사 영업사원으로 일했었고, 현장에 투입되기 전에 6주라는 비교적 긴 시간동안 교육을 받기도 했었다. 신입 영업사원 교육에서는 해당 질환에 대한 공부, 경쟁제품을 포함한 다양한 제품들의 장단점에 대한 공부, 그리고 영업의 기초에 대한 공부, 마지막으로 다양한 상황에 대한 실전에 가까운 연습 등을 했었는데, 약학을 전공했고 연구소에서도 일한 경험이 있었던 나는 다른 교육생들에 비해 질환과 제품 관련된 지식 면에서는 자신이 있었다. 실제로 교육기간 동안에 강사들이 질환에 대한 설명을 나에게 부탁한 적도 몇 번 있어서, 어깨가 으쓱 올라가기도 했었다.

하지만 6주간의 교육기간 동안 대부분의 시간은 사실 내게 바늘 방석같았다. 미국에서 제약회사 영업사원이 현실적으로 의사와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시간은 1분이 채 되지 않는다. 그래서 훈련의 상당 부분이 짧은 시간에 어떻게 효과적으로 정보를 전달하느냐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는데, 5-10분 동안 전달할 분량의 정보를 때로는 30초만에 전달하는 훈련까지도 시켰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의사 역할을 하는 강사 앞에 서서 그야말로 ‘어버버’ 하다가 상황이 종료되고 말았다. 영어가 짧은 나로서는 어쩔 수가 없었다. 정말 부끄럽고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나를 제외하고는 100명이 넘는 신입사원 모두가 미국에서 나고 자란, 게다가 대부분이 대학을 갓 졸업한 젊은 친구들인지라 나와는 나이도 10년씩 차이가 났다. 나는 미국 사회 초년병들 속에서 길을 잃은 왠 동양의 아저씨, 낙동강 오리알 같은 신세였던 것이다.

모든 교육이 끝나고 실제로 영업현장에 마침내 첫발을 내디뎠을 때의 그 공포감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내가 처음 방문한 곳은 어느 흑인 동네의 작은 의원이었다.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 문을 열고 들어갔더니, 환자 대기실에 앉아있던 사람들과 수납을 하는 직원의 눈이 일제히 나에게 꽂혔다. ‘이 동네에서 저 쬐그만 동양인이 대체 뭐하고 있는거지?’ 그런 눈빛이었다.

본격적으로 일을 하면서 영업이란게 내게 체질적으로 안맞는다는 생각도 했었다. 성격이 그리 외향적이지도 않은데다가, 유창하지도 않은 영어로, 반기지도 않는 (나에게는) 외국인인 고객들, 그것도 ‘의사’들에게 말로써 뭔가를 설득하고 받아들이도록 해야 한다는 것 자체가 나에게는 너무나 주눅이 드는 일이었다. 한번은 같은 지역을 담당하는 우리팀의 다른 영업사원과 함께 고객들을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기절초풍을 할 뻔했다. 가는 곳마다 의사, 간호사들과 어찌나 호들갑스럽게 껴안으며 인사를 하고 오랫동안 수다를 떠는지 그 모습을 보면서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이 친구처럼 영업을 할 수는 없겠구나’ 라고 생각을 했던 것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내 영업실적은 처음 몇 달이 지나고 나서부터 야금야금 오르기 시작하더니, 급기야는 전국 3등에 이름을 올리기까지 했다. 팀장님이 매월 있는 팀 회의에서 성공비결을 발표하라고 하는데, 발표는 커녕 나 스스로도 원인을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 이유를 깨닫게 된 사건(?)이 있었다.

여느 때처럼 하루 10명의 고객을 만나기 위해 헤매다가 들른 의원에서, 접수 일도 함께 보는 나이 지긋한 간호사 할머니가 (미국에는 그런 경우가 많다) 나에게 “오늘은 너 혼자 온거니?” 하고 물어본 것이다. 그래서 내가 “네” 라고 대답했더니, 간호사 할머니는 활짝 웃으면서 ‘잠깐만 기다리라’고 하고선 진료실에 있는 의사선생님께 내가 왔다고 귀뜸을 해주었다. 그리고 조금만 기다리면 선생님이 곧 나오실거라고 하면서 하는 얘기가, 사실 내 동료가 오는 날이면 선생님이 ‘지금 없다고 하라’거나 혹은 ‘오늘은 진료가 길어질테니 다음에 오라’고 할 때도 많다는 것이었다. 깜짝 놀랐다.

내가 의아해하는 표정을 짓자, 더 이야기를 해준다. ‘네 동료는 선생님이 바쁘건 말건 관심이 있건 없건 자기 할 말만 잔뜩 하다가 가기 때문에, 선생님이 가급적이면 피하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반면에 나는 말이 많지 않고, 대신에 이야기를 잘 듣기 때문에 환자가 많지만 않다면 선생님이 나와 대화 나누는 것을 좋아한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보니 좀 우스웠다. 내가 말이 많지 않고, 이야기를 잘 들어준다는 것은 영어가 짧고 말하는 것이 두려운 내가 세운 나름의 생존 전략이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 나는 왠만하면 질문 한두 마디만 하고, 가급적이면 고객이 대부분의 말을 다 하도록 하게 하려고 애썼었다. 동기가 좀 잘못되었기는 하지만, 나는 내 나름의 영업의 비결을 그때 깨달았다.

세상살이가 따지고 보면 모두 다 영업 같기도 하고 협상 같기도 하다. 어떤 형태로든 누군가와 대화를 한다는 것이 결국은 나의 생각을 상대방에게 전달하는 것이고, 상대방은 그런 나의 생각에 동의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직장에서 뿐만 아니라 친구와의 대화도 그렇고, 가족간의 대화에서도 마찬가지다. 내가 아무리 말을 많이 한다고 해도, 혹은 내가 아무리 상대방이 ‘찍’소리도 못할 정도로 완벽한 논리로 말한다고 해도, 그것과 그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것은 완전히 별개의 문제이다.

내게 찾아오는 컨설턴트들이 하는 얘기가 내 귀에 ‘윙윙윙윙’ 매미소리처럼 들리는 까닭은, 그들이 잠재적인 고객인 내 생각을 물어보고 귀기울이려고 하는 대신에, 자기가 준비한 이야기만 달달달달 했기 때문이다. 요즘 예능 프로그램에서 ‘Shut Up’ 이라는 노래가 유행이 된 모양이던데, 모름지기 영업을 잘 하거나 대화를 잘 하기 위해서는 좀 닥치고 잘 듣는 연습을 더 해야하지 않을까 싶다.

(2016년 7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