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름이 지났다. 텅 빈 논. 야트막한 산의 마른 풀들. 군데군데 쌓여있는 눈… 출국을 위해 공항으로 향하는 기차 창가에서 보이는 이 한국의 겨울 풍경들이 몇 시간 후면 곧 그리워질게다. 그동안 많은 일들이 있어서인지 한국에서 보낸 지난 2주간의 연말 휴가가 2주보다 길었다는 느낌이다. 하지만 일상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불러오는 아쉬움은 역시 어쩔 수가 없다.

해마다 연말이면 한 해를 정리하는 나만의 의식(?)을 치르곤 했었다. 지난 한 해 동안 무엇을 잘하고 잘못했는지, 무엇을 달리 할 수 있었는지, 새해에는 무엇에 더 역점을 둘 것인지 등등을 자문자답하면서… 그런데 이번엔 달랐다. 특별한 반성도, 계획도 없었다. 그저 발길 닿는 대로, 마음 가는 대로, 시간 가는 대로 나를 내버려 뒀을 뿐. 사람들을 만나고 여행을 하고 TV도 보고 영화도 보고 술도 마셨다.

20년 만에 만난 친구들은 분명 많이 변했을 텐데 신기하게도 내 눈엔 별반 변한 게 없어 보였다. 그리고 모두 예전 학창시절보다 더 서로에게 스스럼없는 듯했다. 그저 반갑고 고마웠다. 또 휴가 중임에도 시간을 내어 밤늦게까지 함께 술잔을 기울여 준 옛 동료들은, 일로 만났지만 이젠 단순히 일 이상의 끈끈함으로 엮인 존재들이라는 느낌이다. 그리고 오랜만에 만난 선배, 후배, 지인들… 사람. 사람들.

산을 오르거나 산책을 할 때, 가끔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면 등 뒤에 전혀 다른 풍광이 있었음을 발견하고는 감동할 때가 있다. 그런 느낌이다. 내 삶의 여정들, 기억의 조각들을 공유한 사람들. 그들이 그저 고맙고 소중하게 느껴진다. 마침 TV에서는 90년대를 주름잡던 가수들이 오랜만에 함께 무대를 꾸미는 예능 프로그램이 돌풍을 일으켰다. 한때는 라이벌이기도 했을 그들이 서로를 보자마자 왈칵 껴안으며 이유도 없이 눈물을 흘리는 모습, 그리고 그것을 보며 많은 내 또래 시청자들이 같이 울고 웃는 것도 비슷한 이유가 아니었을까?

아이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자라서 이제 중학생, 고등학생이 되어 가고, 어머니는 여기저기 아픈 데가 더 많아지셨다. 앞으로만 달리는 ‘시간’이라는 기차 위에 어찌할 바를 모른 채 앉아 있는 느낌이다. 떠나온 과거가 아름답고 애틋하지만 뒤만 보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시간은 어쨌건 앞으로만 흐르고, 나는 아직도 젊고 짊어져야 할 짐들도 많다. ‘앞만 보고 달리기보다는 오로지 현실에 충실하자’고도 하고 싶지만, 아직은 내 내공이 부족한 것인지 미래를 등한시하고 현재에서만 행복을 찾는다는 것도 솔직히 아직 불안하다.

내일부터는 다시 심신을 추스르고 열심히 달릴 것이다. 결국 지난해와 크게 달라질 건 없는 셈이다. 다만 하나. 달려가면서 한 번씩 내가 ‘왜 달리고 있는지’는 더 자주 물어봐야겠다. 그래야겠다.

(2015년 1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