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회사에서 글로벌 마케팅 업무를 하던 시절의 일이다. 그때 각 나라의 주요 고객들을 만나기 위해 출장을 참 많이 다녔다. 한번은 일본에서 의과대학 교수님 한 분을 만나기로 했다. 나를 안내해 줄 일본인 직원이 나더러 아침 6시까지 병원으로 나와달라고 했다. 너무 이른 시간이라 좀 이상했지만 그런 사정이 있나 보다 하고 약속한 시간에 나가보니 병원에는 이미 여러 회사의 영업사원들이 나와 있었다. 다들 도착한 순서대로 연구실 옆 복도의 벽을 등지고 차렷 자세로 서있기에 나도 엉겁결에 그들 틈에서 차렷 자세로 섰다.

한참 뒤에 교수님들이 한 분씩 출근하기 시작했다. 교수님이 복도를 지나갈때마다 양옆에 도열해 있던 영업사원들이 일제히 90도로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한다. 허걱! 영업사원들 대부분은 검은색 계열의 정장을 입고 있었는데 나는 그 모습이 흡사 보스의 등장에 ‘형님~!’ 하며 인사하는 조직폭력배들 영화의 한 장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본의 영업사원과 고객 사이의 극도로 수직적인 관계를 엿볼 수 있는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반면에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아무리 고객이라 할지라도 관계가 수직적이라는 느낌은 그리 받지 않았다. 오히려 간혹 “Hey~ doc. What’s up?” (“이봐, 박 선생. 잘 지냈어?” 그런 느낌?) 하며 고객에게 인사 건네는 영업사원을 보면 ‘저 친구가 미쳤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유럽은 미국보다는 훨씬 격식과 예의를 갖추지만 여전히 일본에 비하면 수평적인 관계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내 나름의 경험에 비추어 나라들을 비교하다 보면, ‘인간관계가 수평적이냐 수직적이냐’는 겉으로 드러나는 형식에 관한 것일 뿐, 더 중요한 것은 따로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사람이 사람을 대할 때 갖는 기본적인 태도가 아닐까. ‘사람에 대한 예의’ 같은 것 말이다. 서양에서 인간관계가 수평적이라고 해서 그것이 상대방을 무시한다는 의미가 아니듯이 일본에서 인간관계가 수직적이라고 해서 상대방을 반드시 더 많이 존경한다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에 대한 예의는 어떤 형태의 관계에서도 기본에 깔려 있을 수 있고 또 그래야 하는 것이다.

외국인들에게 한국 문화에 대해 이야기하다 보면 단골로 나오는 소재들 중에 하나가 한국의 높임말에 관한 것이다.  ‘한국 사람은 예의를 중요시해서 말도 웃어른께 사용하는 표현과 아랫사람에게 사용하는 표현이 다르다’라고 하면, 외국인들은 흔히 신기하다는 반응을 보인다. ‘한국 사람들은 정말 예의가 바르구나’ 뭐 이런 식이다. 그런데 그렇게만 이야기하고 나면 요즘은 사실 좀 개운하지가 않다. 흔히 사람들은 처음 만나면 소위 ‘민증을 까서’ 재빨리 서열을 정하는 데에 익숙하지만, 정작 그것이 서로에 대한 예의를 적절하게 갖추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오히려 예의 따위  신경 안 쓰고 상대방을 함부로 대할 수 있는 권리(?)를 획득하기 위한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도 많기 때문이다. 서열이 명확한 관계에서는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이해하고 보듬어주면 좋으련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허다하다.

사람에 대한 예의. 그것은 단순히 누군가를 공손하게 대하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 ‘사람에 대한 예의’란 내가 미처 알지 못하는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리려는 자세도 포함한다. 학창시절에 <사람아 아, 사람아>라는 소설을 읽은 적이 있다. 중국 문화대혁명 당시의 이야기인데 세세한 내용은 이제 기억나지 않지만 책을 다 읽고 나서 받았던 느낌은 아직도 생생하다.

소설은 화자(話者)인 ‘나’를 중심으로 한 1인칭 시점으로 서술되었고 전체 이야기가 네 개의 chapter로 이루어져 있었다. 첫 번째 chapter를 읽고 나니 ‘나’와 내 주변의 등장인물들이 누구이며 그들 중에 누가 ‘나쁜 놈’이고 누가 ‘착한 놈’인지 등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런데 두 번째 chapter로 들어가니, 이야기의 화자가 다른 사람으로 바뀌어 있었고 새로운 화자의 관점을 통해서 내가 미처 알지 못 했던 새로운 사실과 그 사람의 속사정 등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어허… 이놈이 나쁜 놈인 줄 알았더니 꼭 그렇지도 않네. 오히려 저놈이 나쁜 놈이네.’  나는 새로이 알게 된 정보를 바탕으로 각각의 인물에 대한 내 판단을 바꾸었다. 그런데 세 번째 chapter로 들어가면서 제3의 인물로 다시금 화자가 바뀌었다. 화자가 바뀔 때마다 겪는 나의 혼란(?)은 마지막 chapter까지 반복되었다.

소설을 다 읽고 책을 덮자, 등장인물들에 대해 처음에 가졌던 내 생각들이 얼마나 섣부른 것이었나 싶어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네 개의 chapter 중 하나의 제목이 ‘저마다의 진실’ 이었는데 그 말이 무척이나 마음에 와 닿았다. ‘사람은 누구나 ‘저마다의 진실’이 있는 법인데, 내가 다른 사람의 그 진실을 다 헤아리지 못한다면 상대방을 내 멋대로 함부로 재단해서는 안되겠다’라고 다짐했었다.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이 없지만, 사실 현실에서 항상 그렇게 하지는 못한다. 부끄럽지만 종종 마음 따로 몸 따로다.

요즘 뉴스를 보다 보면 우리 주변에 ‘사람에 대한 예의’가 너무나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보듬으려고 하기는 커녕 용인조차 하지 않는다. 특히나 강한 사람이 약한 사람을 이해하고 배려하려는 자세가 부족해서 생기는 온갖 뉴스들을 보면 참 슬프다.

사람이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서로 다른 인격체가 만나서 서로 다른 생각을 교환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고객과 영업사원의 관계가 그렇고, 부모와 자식의 관계도 그렇고, 친구와 친구의 관계도 그렇다. 경영자와 종업원의 관계, 그리고 더 크게는 지도자와 백성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서로 다른 생각을 교환하는 형식은 그저 편안한 대화가 될 수도 있고, 정교한 협상이 될 수도 있고, 치열한 논쟁이 될 수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다른 생각이라 할지라도 서로 존중하고 예의를 갖추면서 자유롭게 교환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 아닐까.

조직 심리학자이자 Wharton School의 최연소 종신 교수인 Adam Grant 교수가 쓴 <Originals (오리지널스)>라는 책에서, leader의 생각에 누구도 반대할 수 없는 문화를 가졌던 한 기업이 독창성, 창의성의 부족으로 어떻게 쇠락의 길을 걸었는지 흥미롭게 읽은 적이 있다. 그때 일부 한국 기업들이 떠올랐었다. 내로라하는 이름있는 기업들임에도 신입사원 연수교육에서 단체 체벌을 가하는 등 전근대적인 방식을 사용하며 소위 신입사원을 길들이는(?) 곳이 아직도 많다고 한다. 조직과 혼연일체가 되어서 ‘까라면 까’는 조직문화를 만들기 위함인 것 같은데 ‘까라면 까’는 것은 미덕도 아니고 효율적이지도 않다. 같음을 강요하기보다 다름을 인정하고 장려해야 새로운 것도 나온다. 비단 기업만 그런 것이 아니다. 가정도 그렇고 국가도 그렇다. 사람에 대한 예의가 좀 더 필요하다. 그것은 당연한 것이고 또 좋은 것이다.

(2016년 9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