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으로 가는 기차 안. 미국의 전직 대통령 George W. Bush가 ‘아버지 Bush’의 장례식에서 추도사를 하는 모습을 우연히 Youtube로 보게 되었다. 무척이나 엄숙할 법한 분위기였지만 오히려 그는 참석한 많은 사람들을 깔깔깔 웃게 만들고 있었다. 가족만이 알 수 있는 매우 사적인 추억들을 재미있게 이야기하며 살아 생전 아버지의 따뜻하고 인간적인 모습을 추모했기 때문이다. 그 장면은 무척 특이해 보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매우 부럽기도 했다. 추도사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서는 ‘아들 Bush’가 울컥하는 장면이 있었는데 ‘당신은 우리가 아들 딸로서 바랄 수 있는 최고의 아버지였습니다’라고 말하는 대목에서였다. 나도 왈칵 눈물이 쏟아져 버리고 말았다.

오늘은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지 정확히 6년이 되는 날이다. 우리는 제사를 지내지 않기 때문에 딱히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날이라고 가족이 모이거나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어머니는 혼자서 하루종일 아버지 생각을 하고 계실 게 분명했다. 그런 어머니 곁에 있어 드려야겠다고 생각해서 부산행 기차에 올랐던 것이다. 시속 300km로 내달리는 기차 안에서 내 생각도 시속 300km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사방팔방 뻗는 듯 했다. 급기야 30여년 전 우리 곁을 떠났던 동생에게까지 생각이 옮아갔다.

아들만 넷이던 우리 집에서 셋째인 나는 두살 어렸던 동생과는 둘도 없는 단짝이었다. 동생이 초등학교 졸업을 앞뒀던 겨울 방학, 우리는 시골에 계시는 이모님 댁에 놀러 가서 며칠을 보내고 있었다. 그날은 마침 눈이 내렸고 동생과 나는 밖으로 나가 사촌 형과 눈싸움을 시작했다. 얼마 쯤 지났을까, 한참 재미있게 함께 놀던 동생이 갑자기 머리가 아프다고 했다. 눈싸움에 푹 빠져있던 사촌 형과 나는 놀이를 멈출 생각을 않고 동생에게 그냥 혼자 잠깐 방에 들어가서 쉬라고 했다. 나중에 동생의 걸음걸이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닫고 따라가서 동생을 방에 직접 데려다 눕혔을 때는 이미 동생의 의식이 없는 상태였다.

내 동생의 상태를 정확하게 알게 된 것은 시골의 작은 의원, 그리고 읍내의 조금 더 큰 병원을 전전한 후에 부산의 어느 대형병원으로 이송이 된 다음에서였다. 그날 부산으로 향하는 구급차 안. 의식이 없이 축 늘어진 어린 동생 곁에 앉아 차창 밖의 가로등 불빛이 휙휙 지나가는 것을 눈물 그렁그렁 맺힌 눈으로 멍하니 바라보았었다. 지금도 너무나 생생한 슬픈 기억이다. 동생은 부산에 도착해서 수술을 받았지만 결국 우리 곁을 떠나고 말았다. 뇌동맥류 파열로 인한 뇌출혈이었다. 어린 아이에게는 매우 희귀한 일이라고 했다.

동생이 죽고 나서 나는 이상하게도 눈물이 없는 아이가 되어버렸다. 둘도 없는 단짝을 잃어버려 너무나 슬퍼하는게 당연했을텐데, 나는 오히려 겉으로 매우 명랑한 아이가 된 것이다. ‘부모가 돌아가시면 산에 묻고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라고, 막내 아이를 잃은 아버지 어머니의 슬픔이 얼마나 클까를 생각하면서 나는 ‘내가 슬퍼하는 모습을 보이면 아버지 어머니가 더 슬퍼하시게 될 것’이라는 걱정을 했던 것 같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눈이 퉁퉁 부은 엄마가 내 앞에서 눈물을 감추시는 모습을 보곤 했는데 그럴때면 나는 더더욱 엄마에게 학교에서 있었던 일들을 실제보다 10배는 더 신난 척 과장해서 떠들곤 했었다.

내가 동생 때문에 울기 시작한 것은 시간이 한참 흘러 내가 성인이 된 다음이었다. 길을 가다가 동네 골목에서 꼬마 아이들이 깔깔대며 노는 모습을 보는데 갑자기 나도 모르게 눈물샘이 터져버린 것이다. 그 때는 알 수 없었다. 왜 내가 그렇게 주체하지 못하고 펑펑 우는지. 그 뒤로도 비슷한 일들은 여러차례 반복되었다. 주로 멀쩡하게 일상생활을 바쁘게 하다가, 주위에서 들리는 아이들의 웃음소리에 갑자기 미친 듯이 눈물샘이 터지곤 했다.

김형경 작가의 <좋은 이별>이라는 책에 보면 어떤 형태의 이별에서건 ‘애도기간’이라는 것이 필요하다는 말이 나온다. 슬픔을 감추거나 그리운 사람을 억지로 잊으려 하기보다는 슬픔과 분노, 그리고 그리움 등의 감정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내면의 슬픔과 상실을 충분히 표현하는 과정을 거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았을 때는 배설되지 않고 막혀버린 감정이 우리의 치유와 성장을 방해하고, 그것은 결국 언젠가 어떤 형태로든 터져 나온다고도 했다. 아마 나의 경우에도 그러했던 것이 아닐까?

790283C3-425D-4F20-8BA9-9640D458D411

***

예고 없이 갑자기 집에 나타난 내 모습에 엄마는 놀란 표정을 지으신다.

“바쁘고 몸도 피곤할텐데 뭐하러 왔노?”

‘왠지 곁에 있어 드려야 할 것 같아서’라는 내 말에 엄마의 눈가가 촉촉해졌지만 입에는 옅은 미소가 비치시는 듯 하다. 오길 잘했다 싶었다.

“또 하루 종일 아빠 생각하셨지?”

나는 엄마에게 핀잔을 주는 듯 웃으며 얘기했다. 엄마는 미리 말하고 오지 않아서 먹을 것이 없다며, 주섬주섬 냉장고에서 배 하나를 꺼내서 깎아 주신다.

일상의 다른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엄마에게 기차에서 본 Bush 대통령 장례식 이야기를 해드렸다. 직접 비디오를 보여드린 것도 아닌데, 어머니는 내 설명 만으로도 눈물이 그렁그렁해지셨다.

“그런데 엄마. 그 비디오를 보다가 드는 생각이… 나는 아버지 살아 계실 때, ‘아빠 고마워요. 사랑해요. 고생하셨어요.’ 그런 얘기를 너무 해 드리지 못했던 거 같다는거야.”

그 말을 하는데, 갑자기 눈물이 왈칵 쏟아지더니 나는 급기야 꺼이꺼이 울고 말았다. 에그머니나… 좀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예전 같으면 어떻게든 참으려고 했을 울음을, 특히나 엄마 앞에서, 굳이 멈추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울면 더 크게 펑펑 우실 줄 알았던 엄마는 의외로 담담하게 오히려 내 눈물을 닦아주신다.

3년여의 암투병 끝에 마침내 기력이 다하셨던 아버지는 어느날 밤에 당신이 곧 돌아가실 것을 직감하셨는지 그날 당번으로 병상 옆에서 자고 있던 나에게 당신의 말씀을 받아 적어달라고 하셨었다. 엄마와 우리들에게 남기시는 마지막 말씀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날부터 아버지는 더 이상 말씀조차 하실 수 없게 되었다. 좀 더 시간이 흘러 임종이 다가왔을 때, 나는 아버지의 귀에다 대고

“아버지, 우리 이렇게 키워주시느라 고생하셨어요. 고맙습니다. 사랑해요.”

라고 속삭이며 흐느꼈다. 그때 아버지께서 내 말을 알아 들을 만큼의 의식조차 있으셨는지 없으셨는지는 알 수 없다. 내 말을 알아들으셨었다면 좋겠다.

회자정리(會者定離). 이별은 항상 일어난다. 이별을 피할 수 없다면 이별을 잘 받아들이는 것, 즉 적절한 애도기간을 거치면서 ‘좋은 이별’을 하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우리 삶에서 언제 어떻게 이별이 갑자기 닥칠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는 걸 감안하면, ‘좋은 이별’을 준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곁에 있는 사람에게 더 많이 더 자주 마음을 표현해 주는 것 아닐까. 내일 갑자기 얘기치 않은 이별이 일어나서, 오늘이 이별하기 전 그 사람과 함께 하는 마지막 날이었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을 때 너무 크게 후회하지 않도록…

나는 가끔 후회한다//… 그때 사람이/ 그때 일이/ 노다지였을지도 모르는데//… 열심히 귀기울이고/ 열심히 사랑할 것을//… 모든 순간이 다아/ 꽃봉오리인 것을//… 열심에 따라 피어날/ 꽃봉오리 것을!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 (정현종) 중에서 

(2018년 12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