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에 독서 동호회가 있다. 회원에게는 분기마다 책 두권씩을 사준다. 하나는 함께 읽고 토론할 책, 다른 하나는 본인이 평소에 읽고 싶었던 책. 이번 분기에 나는 <골든아워>라는 책을 신청해서 받았다. ‘아덴만의 여명’ 작전으로 유명세를 탔던 중증외상 분야 권위자 이국종 교수가 쓴 책이다. ‘생과 사의 경계, 중증외상센터의 기록’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책은 이국종 교수의 수필집이라고 소개되었지만, 그 내용은 여느 소설보다 더 긴장감이 넘쳤다. 주말 내내 책을 좀처럼 손에서 내려놓지 못하고 내리 다 읽고 말았다.

책을 읽으면서 무엇보다 내가 놀랐던 것은, 사람의 생과 사를 가르는 최전선에서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하는 의미있는 일을 함에도 불구하고 그가 얼마나 오랫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무지와 무관심 심지어 편견과 멸시 속에 방치되어 왔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얼마나 끈질기게 자기 자리에서 버텨왔느냐 하는 것이었다. “아무리 수많은 사람이 노력하고 필요성을 알린다고 해도 국가정책이 움직일 수 있는 파이(Pie)는 정해져 있어요. 그게 현실이고 사실이죠.” 이국종 교수에게 멘토역할을 했다는 국회 관계자의 이 말은 그가 직면했던 냉혹한 현실의 어려움을 한마디로 보여준다. 그에게는 너무도 절박하고 당연해 보이는 일들이, 정책을 만들고 자원을 배분하는 사람들의 우선 순위에서는 자꾸만 뒤로 밀려났던 것이다.

사실 이런 경우는 일하면서 꽤 자주 겪는다. 내가 생각하는 우선 순위와 다른 사람이 생각하는 우선 순위가 다른 경우 말이다. 특히 나보다 지위나 역할이 큰 사람이, 당면한 우선순위에 대해 나와 생각이 다를 때면 나는 고민하게 된다. ‘혹시 나는 ‘나무’를 보고 있지만, 그는 내가 보지 못하는 것들까지 포함해서 ‘숲’을 보고 있어서 그런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때면 내 판단에 자신이 없어지고 내 생각을 계속 주장하는 것이 쉽지가 않다.

그런 나에게 정신이 번쩍 드는 조언을 해 준 스승이 있다. 내가 미국 본사의 글로벌 마케팅 팀에서 일할 당시 나의 상사였던 Jochen이다. 나는 당시에 잘 나가던 제품의 마케팅 팀 소속이 아니라, 성장 여력이 별로 없어 보이는 오래된 제품의 마케팅 담당자로 발령이 났었다. 인원도 많고 예산도 풍부한 다른 팀들에 비해 나는 혼자서 A부터 Z까지 나에게 주어진 제품과 관련된 모든 것을 다 해야하는 완전 ‘원맨쇼’였다. 당연히 예산도 그리 많지 않았다.

나는 각 지사에서 나의 제품을 담당하는 직원들이 minority로서의 서러움을 겪지 않도록 힘과 용기(?)를 주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고민했다. 하루가 멀다하고 유럽으로, 아시아로, 남미로 출장을 가서 그들을 만났고, 그들의 내부고객과 외부고객들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부지런히 정기 teleconference를 열어서 전략과 자료들을 공유했고, newsletter도 발간하고, 힘들지만 일년에 한번씩 모두가 한자리에 모이는 행사도 마련했다. 그 덕분인지 우리는 끈끈한 동지애로 똘똘 뭉친 우리 만의 외인구단이 되어갔다.

회사 내의 senior leader들에게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우리 팀을 더 지원해 달라고, 우리 제품과 팀원들에게 더 관심을 보이고 더 칭찬과 격려를 해 달라고 노래를 불렀다. CEO와 Executive Committee 멤버들에게 우리 팀의 annual meeting에 들러서 격려인사라도 해달라고 사정했고, CFO에게는 분기별로 내보내는 회사의 quarterly financial update에 우리 제품에 대해 조금 더 highlight 해 달라고 부탁했다. 돌이켜보면 나의 그런 모습은 풋내기 global marketer가 뭣도 모르고 이리 날뛰고 저리 날뛰는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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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어느날 나는 독일지사 출장을 마치고 돌아오면서 고민에 빠졌다. 지사 방문의 마지막 절차는 항상 그곳 지사장에게 방문 결과에 대해 브리핑 하는 것이었는데, 나는 여느때처럼 우리 제품과 우리 팀들에 대한 지원과 관심을 부탁하는데 열을 올렸다. 독일 지사장은 내 말을 차분히 귀기울여 들어주었지만, 나는 돌아서면서 ‘내가 큰 그림도 잘 모르면서 내 제품, 내 동료만 더 지원해 달라고 떼쓰는 것이 맞는것인가’ 라는 회의감에 휩싸였다. 본사로 돌아와서 출장결과를 boss에게 보고하는 자리에서 나는 물었다.

“Jochen. 내가 계속 지금처럼 하는게 맞는건가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내 질문에 Jochen이 답했다.

“Taejin. You are paid to be biased.” (태진, 너는 그러라고, 편협해지라고 월급 받는거야.)

정신이 번쩍 드는 말이었다.

***

시간이 지나고 보니 어떤 조직에서건, 어떤 자리에 있건 결국 다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한 제품을 담당하는 마케터였다가 모든 제품, 모든 부서를 다 살펴야 하는 지사장의 자리에 앉아보니, 예전에 내가 상대했던 독일 지사장이 느꼈을 어려움을 이해할 수 있다. 모든 부서가 다들 더 많은 지원을 요청하고, 모든 사람들이 다 자기가 직면한 문제가 제일 중요하고 급하다고 아우성친다. 결국 자원이란 제한적이므로 나는 우선순위를 정할 수 밖에 없고, 사람들에게는 내가 그렇게 정한 이유를 설명해야 한다. 필연적으로 실망하는 사람들도 생긴다. 나는 그들이 낙담해서 열정을 잃고 일을 손에서 놓게 될까봐 노심초사한다. 최대한 납득시키고 이해를 구한다. 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계속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도록 다독이고 독려해야 한다. 쉽지만은 않은 일이다.

그리고 고개를 조금만 돌려보면 나는 내 부하직원들이 나에게 했던 것과 똑같은 일을 나의 상사에게 하고 있다. 단지 스케일이 조금 다를 뿐이다. 전세계 수십개 나라를 총괄하는 보스에게, 왜 한국이 중요한지, 왜 한국지사에 투자하는 것이 그토록 가치있는지, 혹은 우리가 당면한 문제가 얼마나 위중한지 등을 최대한 열심히 설명해야 한다. 때로는 허세도 부려야 하고 때로는 바짓가랭이 붙잡고 매달리듯 애걸도 해야 한다. 그렇게 내 boss와 본사의 여러 힘있는 사람들에게 “Team Korea”를 selling 해서 그들이 중국, 호주, 브라질, 러시아보다 한국이 더 중요하다고 믿고 조금이라도 더 관심을 갖고 지원하게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 순간만은 그들이 보는 ‘숲’보다 나의 ‘나무’가 더 소중하다. 왜냐하면 나는 그러라고 이 자리에 있는거니까…

사람들은 나무를 보지 말고 숲을 보라고들 한다. 하지만 나에게 한그루 나무가 주어졌다면 나는 숲이 어떻게 생겼는지 호기심을 잃지 않되 나의 나무에게 정성을 다해야 한다. 그것이 나에게 주어진 일이고, 결국엔 나무가 있어야 숲도 있는 법이니깐.

(2019년 4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