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부서장으로 일하던 시절, 일 년에 두 번씩 팀원들과 함께 워크샵을 진행했다. 그해 10월에는 안면도에 있는 널찍한 펜션을 빌려서 갔는데 첫날 오전 일정으로 우리는 부서의 발전 방향에 대한 진지한 논의를 했고 오후에는 함께 재미난 게임도 하면서 하루를 보냈다. 그리고 저녁 식사 시간에 열린 바베큐 파티. 불 위에 각종 고기와 해산물이 푸짐하게 올라왔고, 와인, 위스키, 이강주, 복분자주 등 직원들이 가져온 다양한 술들도 테이블을 가득 채웠다. 맛있는 음식과 좋은 사람들이 어우러져 모두가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분위기 쵝오!

한창 왁자지껄 신나게 먹고 떠들고 있을 때 전체 행사를 준비한 우리 부서의 CEO (Chief Energy Officer)인 L이 K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K님, 혹시… 태진님께 이야기하셨어요?

그런데 그 질문을 옆에서 엿들은 사람들이 갑자기 내 눈치를 살피기 시작하고, 이내 사람들의 분위기가 싸해졌다.

질문을 받은 K가 어두운 낯빛으로 우물거렸다.

“아뇨, 아직…”

그러자 이번엔 L이 당황한 표정으로 말한다.

“아직 안 하셨어요? 아까 따로 하실 거라더니…”

그 말에 K는 낯빛이 더 어두워지더니 급기야 황급히 식사 자리를 벗어나 자기 방으로 달려들어가 버린다.

(엥?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이지???)

그걸 지켜보던  H가 내 옆에서 혼잣말을 한다.

“요즘 사람들이 X사로 많이들 가네. 왜 그런가 몰라… 거기가 우리보다 월급을 많이 주나?”

(아니 이건 또 무슨 소리야?)

그리고 H가 내게 말한다.

“아니, 왜, 지난번 협회 미팅 때 눈치 못 채셨어요?”

“아뇨. 무슨 눈치?”

“아니 그때 K가 X사 사람들이랑 같이 미팅도 하고… 나는 이미 아시는 줄 알았지…”

그때 L이 다시 거든다.

“아마 K님이 오늘은 말씀을 드리려고 했는데 태진님이 오늘 워크샵에서 우리 부서의 발전방향에 대한 session을 진행해 달라고 K님에게 부탁하시니까 차마 어떻게 말씀을 드려야 하나 고민하다가 타이밍을 놓쳤나 봅니다.”

망치로 머리를 크게 한 대 맞은 느낌이었다. 그런 거였구나. 이럴 수도 있는 거구나…

매사에 열정적이고 적극적인 K는, 아직 경험이 비교적 일천하다는 주위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내가 팀장으로 승진시킨 이후 탁월한 성과를 내며 승승장구했었다. 나는 내 믿음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해 준 K가 너무 고마웠다. K와 나는 손발이 척척 맞았고 그 덕분에 우리 부서는 최고의 성과들을 연달아 줄줄이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K에게 이번 워크샵에서 우리 부서의 비전에 대해 논의하는 session을 진행해 달라고 부탁했고, 그는 역시나 내 기대에 걸맞게 해당 session도 멋지게 잘 진행해 주었다. 그래서 팀원들 모두가 긍정적인 에너지로 가득 차 있는 이 순간… 하필 이 타이밍에… 나는 뒤통수를 크게 한 대 맞은 느낌이었다.

‘다른 직원들은 이미 다 알고 있었던 모양인데, 어째서 나만 모르고 있었던 거지? 왜 이런 일이 있으면 진작에 나한테 이야기하지 않았던 거지? 왜 우리 부서의 비전에 대해 한창 이야기한 직후에 이런 식으로 찬물을 끼얹는 거지? 오늘 저녁과 남아 있는 내일까지의 일정을 도대체 어떻게 소화해야 하는 거지? 이 상황에서 내가 어떤 표정을 짓고 어떤 말을 해야 나머지 부서원들에게 미칠 부정적인 영향을 최소화할 수 있는 거지?’ 짧은 시간에 수많은 질문과 생각들이 머릿속을 휩쓸고 지나가고, 사람들은 이 상황이 어떻게 정리될 것인지 초조하게 내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그때 K가 이끄는 팀의 신입사원인 B에게 Y가 조용히 물었다.

“B님도 알고 있었어요?”

“예, 처음엔 저도 많이 놀랐는데 그래도 본인이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고 가시는거라서 저도 이해를 하려고…”

(이런 제기랄…)

그때 R이 내게 술잔을 들고 와 건네며 위로한다.

“태진님, 한잔하세요. 뭐, 어쩌겠습니까?”

그러자 비교적 최근에 우리 부서에 합류한 M이 다소 상기된 얼굴로 말한다.

“참 이해가 안 되네요. 그런 일은 따로 여기 오기 전에 태진님께 일대일 면담을 통해서 말씀드렸어야지, 어떻게 이런 자리에서 이런 식으로 말씀을 드리는거죠? 나는 K님도 이해가 안 가지만, 이런 이야기를 꺼낸 L님도 이해할 수가 없네요.”

그 사이 K의 팀원인 P가 K를 따라 방으로 쫓아 들어가더니 잠시 후 K를 데리고 나왔다. 다시 모두가 모여있는 자리로 돌아왔지만 고개를 푹 숙인 채 미안한 표정으로 차마 나와 눈을 맞추지도 못하는 K…

“태진님… (죄송해요)”

아… 그때 내 마음속에서 일었던 감정의 폭풍이란…

그리고 K가 내 뒤로 오더니 살며시 낮은 목소리로 말한다.

태진님, 많이 화나셨죠? 실은 몰래카메라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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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직 상황 파악을 못한 채 굳은 표정을 풀지 못하고 있는 나를 보며 K가 활짝 웃는다. 그리고 그 옆에서 R이 깔깔깔 웃으며 말한다.

“진짜 속으셨나 보네~~. 이거 진짜 태진님 표정을 비디오로 찍었어야 하는건데.”

그제서야 나는 조금씩 정신이 들기 시작했다. 

(뭣이라???)

H도 나를 보며 웃으며 말한다.

“아니, 진짜로 믿었어요? 태진님 정말 순진하시네.”

K도 웃음을 감추지 못하며, 하지만 미안한 듯 말한다.

“태진님 죄송해요. 제가 가긴 어딜가요~.”

마침내 상황을 온전히 이해한 나는 안도감과 허탈감에 맥이 탁 풀려버렸다.

그럼 이거 나만 빼고 다들 알고 있었던 거예요? 다 짜고 친 거야?

***

알고 보니 부서원들은 워크샵 중간중간에 내가 자리를 비울 때마다 자기들끼리 이 몰래카메라 이벤트를 준비했다고 한다. 나는 마치 천당과 지옥을 롤러코스터를 타고 지난 듯한 느낌이었지만, 부서원들 모두가 나를 위해 그런 발칙한 계획을 했다는 것에 마음 한켠이 따뜻해졌다. 그리고 어떻게 수습해야 할까 막막했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제자리로, 아니 원래보다 훨씬 더 높은 자리로 돌아온 것이 기쁘고 감사할 따름이었다.

먹먹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내게 L이 책 한 권을 내민다.

“태진님. 이거 태진님 드릴려구 우리가 함께 준비한 거예요.”

그것은 내가 그 무렵 읽고싶어 했던 신간 서적이었다. 책 안쪽에는 부서원들 모두의 사인과 간단한 메시지도 적혀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깜짝 선물까지 받아들고서 나는 너무 기쁘고 고마운 마음에 눈물이 날 뻔 했다. 흘러간 옛 노래 <시월의 마지막 밤> 가사처럼 ‘지금도 기억하고 있’는 아름다운 밤이었다.

그 뒤로 해마다 10월 31일이면 그때를 떠올리며 미소짓게 된다. 당시에 함께 일했던 동료들은 지금은 대부분 여기저기 흩어져 있지만, 우리는 아직도 가끔씩 안부를 주고받으며 삼삼오오 모이곤 한다. 함께 술잔을 기울이며 그 시절을 즐겁게 회상하다보면 이제 이들은 한때의 동료에서 더 나아가 인생의 동무가 된 듯한 느낌이다.

회사생활을 오래하고 직급이 높아질수록 직원들과 편하게 지내기가 예전만큼 쉽지가 않다. 회사가 제대로 성과를 내는 조직이 되기 위해서는 다양한 배경과 성향과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모이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믿기 때문에 끼리끼리 모이는 순혈주의나 줄 세우기를 지양하려고 의식적으로 조심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한국에 사장으로 부임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는 어떤 직원이 나에게 ‘사장님은 회사에 친한 친구가 있으세요?’라고 묻는데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가 괜한 불편한 오해를 산 적도 있다. 직장이란 특수한 목적을 갖고 사람들이 함께 모인 집단이므로 친구를 만드는 것이 우선순위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의미였을 뿐 회사에서 인간관계 맺기를 일절 거부한다는 뜻은 아니었는데 아마 그 직원은 당시에 내 말을 잘못 해석했던 것 같다. 

하지만 나도 사람인지라 가끔은 직원들, 동료들과 격이 없이 어울리고 그들과 친구처럼 속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해질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몇해 전 그 시월의 마지막 밤이 떠오른다. 서로가 서로를 위해주는 마음이 너무나 가득했던 그 날, 그 밤… 그때 참 좋았다.

(2019년 7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