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이 드디어 천만관객을 돌파했다고 한다. 극장에서 이 영화를 두번 본 관객으로써 나는 그 소식이 마치 내 일인양 기쁘다. 관객들의 호불호가 많이 갈린다는 이야기도 들었지만, 같은 영화를 극장에서 두번 보는 일이 좀처럼 없는 나에게 이 영화는 그만큼 재미있었다. 출연자들의 연기와 그들이 그려내는 캐릭터들도 좋았고 특이한 이야기와 곳곳에 숨어있는 상징들을 곱씹어 보는 것도 참 재미있었다.

아들아, 너는 계획이 다 있구나.

영화를 보고나서 오랫동안 머리 속에 맴도는 것은 영화에서 여러번 언급된 “계획”이라는 단어였다.

“가장 완벽한 계획이 뭔지 알아? 무계획이야.” 라는 송강호의 대사를 안주삼아 나는 친구와 오랫동안 이런저런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살면서 정말 계획이 얼마나 필요한지, 혹은 필요가 없는지…

<깃털과 초콜릿>에서 언급한 적 있지만 내가 아무리 열심히 계획하고 노력한다고 해도 인생은 계획대로 100% 펼쳐지지는 않는다. 내가 제어할 있는 나의 노력이, 내가 제어할 없는 주변 환경이나 시대의 영향과 끊임없이 상호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생은 100% 운이나 우연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100% 내 의지라고 할 수만도 없다. 내가 주어진 변화에 대응하는 방식과 내가 살고있는 시대, 장소, 처해있는 여건 등이 ‘나’라는 사람의 삶의 방정식 f(x)라면, 인생은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변화들이 내 삶의 방정식에 대입되었을 때 나오는 결과물들의 연속적인 합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공식으로 표현하자면 이런 거?

Life=Σf(chan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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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정초에 나는 뚜렷한 계획을 갖고 있었다. 몇년 전 한국에 부임한 이후 감사하게도 회사는 계속 성과가 좋았다. 물론 실수도 있었고 힘든 순간들도 있었지만 회사는 나날이 성장했고 우리의 발전에는 점점 가속도가 붙고 있었다. 나는 창립 10주년을 막 넘긴 우리 회사의 새로운 10년을 열어갈 2019년의 계획에 대해 자신감이 넘쳤다. 회사의 가속성장세를 뒷받침하기 위해 새로운 사람들을 대거 채용할 것이었고, 그들과 새로운 제품들의 출시를 준비할 것이었으며, 또 그 과정에서 회사의 새로운 문화도 발전적으로 구축해 나갈 계획이었다. 신년 행사에서 나의 원대한 ‘계획’을 직원들과 공유할 생각에 나는 약간 짜릿한 흥분까지 느꼈었다. 

밤 늦게까지 생각을 가다듬다가 주섬주섬 가방을 챙겨 퇴근하면서 나는 습관적으로 핸드폰을 열어 새로 들어온 이메일이 있는지를 확인했다. 그리고는 본사 회장님으로부터 막 도착한 따끈따끈한 메일 한통을 발견했다. “Dear Colleague”로 시작하는 제법 긴 내용의 심상치 않아 보이는 이메일이었다. 나는 꼼꼼하게 읽기 위해 가던 걸음을 멈추었다… ‘뭐라고? 우리 회사가 매각된다고???’ 그렇다. 잘 나가는 우리 회사를 약 90조원을 받고 매각하기로 했다는 청천벽력같은 소식이었다. 내 머릿 속은 마치 정규 방송시간이 다 끝난 텔레비전처럼, ‘삐~’ 하는 소리와 함께 모든 생각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그 이후의 지난 7개월은 불확실성과 임기응변의 연속이었다. 2019년에 대해 내가 애초에 세웠던 모든 계획들은 수정되어야 했다. 끊임없는 계획의 수정과 수정된 계획의 수정이 반복되었다. Plan A가 안되면 바로 Plan B를 시행하고, 그 와중에 Plan B가 안 통할 경우의 Plan C와 D를 생각해 내야했다. 예기치 못한 사건과 사고와 변수가 튀어나와 계획을 다시 수정해야 때마다 지쳐 나가 떨어지지 않으려고 속으로 이런 저런 주문(?) 외우기도 했다. ‘ 또한 지나가리라 (This too shall pass)’, ‘All is well’ (영화 < 얼간이>), ‘하쿠나 마타타’ (영화 <라이온 >)… 하루는 일기에 이런 글을 남겼다.

더 이상 문제가 문제로 여겨지지 않고, 그냥 이 모든 것이 내가 풀어가야 할 challenge 가득한 게임처럼 느껴진다. 하나를 해결하면 다음 문제가 나오는 것이 당연한 게임.

‘Why Success Always Starts with Failure (왜 성공은 늘 실패로부터 시작하는가)’라는 부제가 딸린 책 <Adapt>에는 이런 말이 있다.

Today’s challenges simply cannot be tackled with ready-made solutions and expert opinions; the world has become far too unpredictable and profoundly complex. Instead, we must adapt—improvise rather than plan, work from the bottom up rather than the top down, and take baby steps rather than great leaps forward. (오늘날의 문제들은 미리 만들어진 해결책이나 전문가 의견 만으로는 도저히 해결될 수가 없다. 그러기에는 세상은 너무 복잡해졌고 그래서 지극히 예측불가하다. 따라서 우리는 적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계획을 세우기보다는 임기응변할 있어야 하고, 상명하복 하기보다는 현장의 목소리를 반영해서 일해야 하고, 커다란 진보보다는 작은 진전들을 만드는 것을 택해야 한다.)

어떤 예기치 못한 상황이 벌어졌을 때 그 일 자체가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것이었다면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해 한탄만 하고 있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안된다. 오히려 빨리 주어진 상황을 받아들이고, ‘내가 그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에 집중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누가 내 치즈를 옮겼나>에 나오는 생쥐 혹은 꼬마인간 허(Haw)가 그랬듯이.

비지니스에도, 경력관리에도, 인생에도 ‘계획’은 필요하다. 하지만 회사를 운영하면서 해마다 세우고 점검하는 중장기전략(Long Range Plan)처럼, ‘계획’은 일어날 일에 대한 정확한 ‘예측’이라기 보다는 어디로 가고자 하는지 ‘방향성’을 세우는데 더 큰 의미가 있다. 그리고 계획이 절대로 계획대로 될리는 없다는 현실의 아이러니를 생각해 보면, 우리에게는 ‘계획을 세우는 것’ 못지않게 계획대로 되지 않을 때 낙담하거나 포기하지 않는 “resilience(끈질김)”과 끊임없이 바뀌는 여건 속에서도 새로운 방법을 계속 모색할 수 있는 “flexibility(유연성)”이 중요한 것 같다. 

가만… 이게 혹시 기생충의 특징인가??

(2019년 7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