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서현이는 입이 무척 짧았다. 한 번은 식탁에서 밥을 너무 먹는 둥 마는 둥 하기에 내가 참다못해 한마디 했다.

“서현아. 너 밥 잘 안 먹으면 라이언(Ryan)처럼 된다.”

라이언(Ryan)은 서현이의 유치원 친구인데 또래에 비해 체구가 지나치게 작은 아이였다. 그런데 내 말을 들은 서현이가 깜짝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나를 빤히 쳐다보다가 한마디 한다.

“내가 사자(lion)가 된다고?”

으이그… 내 발음이 안 좋았나 보다. ㅠㅠ;

“아니… 너 친구 있잖아! 라이언!”

“You mean… Ryan? (Ryan 말하는 거야?)”

“그래! 롸! 이! 언!!!”

대부분의 한국인들처럼 나도 “r” 발음과 “l” 발음을 구분하는 것이 쉽지가 않다. 특히 ‘r’과 ‘l’이 붙어 있는 단어는 최악이다. 내 약점을 잘 아는 서현이 서준이는 간혹 나에게 ‘world’나 ‘girl’ 같은 단어들을 발음해 보라고 시키고는 내 발음이 이상하다며 자기들끼리 깔깔대며 웃곤 했었다.

***

외국에서 직장생활을 아무리 했어도 소위 말하는 ‘토종’인 나에게 영어는 늘 불쑥불쑥 장애물로 다가오곤 했다. 미국에서 일할 때 한 번은 회의에 내가 모르는 동양인이 들어온 적이 있었다. 당연히 모든 회의는 영어로 진행되었다. 그런데 회의가 끝나자 이 동양인이 다가오더니 나에게 유창한 한국말로 정말 잊을 수 없는 황당한 인사를 건네는 것이 아닌가.

“한국 분이시죠? 그런데 고향이 경상도 쪽이신가 봐요?

허걱… 회의 중에 한국말을 한마디도 안 했는데 어떻게? 내 발음만이 아니라 영어 억양마저도 내가 한국 사람, 더 나아가서 경상도 사람이라는 표가 팍팍 난다는 말인데 정말 황당하고 기가 막혔다.

영어는 예나 지금이나 직장인들이 ‘자기 계발’이라는 것을 하려고 할 때 가장 많이 떠올리는 것 중의 하나인 듯하다. 최근 나온 직장인의 자기 계발 관련 통계 결과를 보더라도 ‘영어회화’가 대리, 과장, 차장급에서 자기 계발 활동의 단연 1위를 차지한다고 한다고 하니 말이다. 글로벌 기업 혹은 다국적 기업에서 일을 하려면 외국어 실력, 특히 영어실력이 중요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업무의 많은 부분이 지역본부 혹은 글로벌 본사에 있는 외국인 동료들과의 협업으로 이루어지는 직무인 경우라면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영어는 완전 필수다.

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 착각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영어는 어디까지나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 필요한 기본적인 도구일 뿐이지 그 자체가 업무의 성패를 가르는 핵심적인 경쟁력은 아니라는 점이다. 대개 직원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원활한 의사소통이 가능한 수준의 영어실력이고, 여기서 ‘원활한 의사소통’이라는 것은 원어민 수준의 유창한 영어실력을 말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자기 생각을 상대방이 큰 어려움 없이 이해하도록 만들 수 있는 정도의 실력이라면 충분한 것이다. 문법적으로 완벽할 필요도 없고, 발음이 ‘빠다(butter)’같을 필요도 없고, 어려운 어휘를 쓸 필요도 없으며, 늘 온전한 문장으로 이야기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사실 내가 함께 일하는 외국인 동료들의 국적은 영어권의 미국, 영국 출신보다 이탈리아, 브라질, 멕시코, 중국 등 비영어권 국가 사람들이 더 많다. 잘 들어보면 그들이 구사하는 영어도 문법적으로 틀린 경우가 많으며 발음이나 억양이 이상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지역본부 혹은 글로벌 본사에서 다들 잘 나간다. 미국인 영국인 수준의 유창한 영어가 꼭 필요한 것은 아니란 얘기다.

그럼 뭣이 중헌디? 내 생각에는 영어 이전에 한국어 (혹은 모국어) 실력이 훨씬 더 중요한 것 같다. 직장에서의 대화는 논리적으로 말하기가 기본인데 한국어로 말할 때 논리적이지 못한 사람이 영어가 유창하다고 영어로 말할 때 논리적이 될리는 만무한 법이기 때문이다. 사실 한국어로 논리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사람조차도 영어로 말하다 보면 영어에 신경이 쓰여서 내가 뭔 소리를 하고 있는지 헷갈리기도 하고 그러다 생각이 꼬여버리기도 한다. 그러니 적어도 한국어로 사고하고 말하는 실력만큼은 탄탄하게 다져둘 필요가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요즘은 사람들의 한국어 실력이 갈수록 줄어드는 게 아닌가 싶다. 여러 나라에 출장을 다니다가 한국으로 돌아오면 눈에 들어오는 것 중의 하나가 한국에는 정말 영어 간판이 많다는 점인데 약간 아이러니하다는 느낌이다. 사실 영어라고 할 수도 없는, 말도 안 되는 영어 간판들도 많고 굳이 영어를 쓸 필요가 없는데 영어로 써 놓은 것들도 많고 그만큼 (엉터리) 영어는 넘쳐나는데 반면에 제대로 된 우리말은 점점 적어지는 것 같으니 말이다. 심지어는 신문기사도 요즘은 ‘이게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하려는 기사인 거지?’ 싶을 만큼 요지가 없거나 앞뒤 논리가 부족한 것들이 너무 많다. 게다가 문법적으로 맞지 않는 비문이나 오탈자까지 당당하게 담겨 있는 ‘기사’를 접하게 될 때는 말문이 막힌다. 요즘 학교에서는 국어공부를 안 하나?

***

6년의 미국 생활 후에 한국지사로 처음 발령받아왔을 때, 사람들은 ‘웬 한국인이 미국 본사로 입사했다가 한국으로 낙하산처럼 온다’며 나에 대한 말들이 무성했던 것 같다. 신라시대 신분제도인 골품제도에 빗대어서 나는 ‘성골’, 다른 임원들은 ‘진골’이라는 농담들도 하곤 했다고 한다. 그런데 하루는 그런 나를 한 동료가 아주 재미있게 ‘디스(?)’했다.

“아휴~ 태진님을 보니까 저도 글로벌하게 클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깁니다.”

“아 그래요? 왜요?”

“미국에서 잘 나가던 분이 한국에 오신다기에 영어를 엄청나게 잘하시나 보다 했는데 막상 뵈니까 그렇지가 않아서요 ^^”

“그래요? 제가 희망을 드렸다니 기쁩니다. ㅎㅎㅎ”

맞다. 영어는 잘하면 좋다. 하지만 영어가 다가 아니다. 영어 이전에 국어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학과목도 줄여서 ‘국영수’다. ‘영수국’이 아니고.

(2019년 12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