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직장인 C사에 주임급 연구원으로 입사해서 얼마의 시간이 흐른 후 난생처음 ‘승진’이라는 것을 앞두게 되었다. 요즘도 그러한지는 모르겠지만 당시 승진대상자들은 일종의 시험 및 인터뷰 같은 관문을 거쳐야 했다. 당시 나의 대리 승진시험 문제는 다음 두 가지였다.

‘제일 좋은 회사’란 과연 어떤 회사를 말하는 것인지 본인이 생각하는 개념을 기술하고 그러한 회사를 만들어가기 위하여 회사가 정책적으로 중점을 두어야 할 부분과 중간관리자 위치인 대리로서의 나의 역할 및 실천방안에 대하여 논하시오.’

‘현재 연구개발 프로세스 현황 및 운영상의 문제점을 기술하고, 우리 종합기술원에 적합한 연구개발 프로세스는 무엇인지 논술하시오.’

최종 심사 결과에 따라 승진대상자들은 진급자와 ‘물먹은’ 사람으로 나뉘면서 희비가 엇갈렸었다. 승진이 된다는 것은 기쁜 일이기는 하지만 함께 입사한 동기들 중에 누구는 앞서가고 누구는 뒤처지기 시작한다는 현실이 모두를 불편하게 했던 기억이 난다.

승진자 발표 후에는 의례적으로 축하 겸 위로를 위한 회식이 열렸고, 사람들은 승진제도의 문제점에 대해 저마다 갖고 있는 생각이나 불만들을 소주잔과 함께 털어놓곤 했다.

“나는 누구처럼 윗사람들한테 아부하는 거 딱 질색이야.”

“회사에선 자기 PR도 어느 정도 해야 하는데 너는 너무 선비 같아서 그런 걸 못해.”

***

많은 글로벌 기업들이 임직원의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무기명 설문조사를 실시하는데, ‘Pulse Survey’, ‘MyVoice’ 등의 이름이 붙는 이러한 설문조사에서는 임직원들이 회사에 얼마나 소속감을 느끼며 일하고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여러 가지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회사의 비전과 전략에 얼마나 공감하느냐’, ’당신은 회사의 리더들을 얼마나 신뢰하느냐’, ‘당신은 회사의 여러 가지 제도나 정책에 대해 얼마나 만족(혹은 불만족)하느냐’ 등등. 그리고 설문의 결과가 나오면 회사는 이를 다시 전체 임직원에게 공유하면서 회사가 앞으로 새롭게 시작하거나 (start), 중단하거나 (stop), 혹은 유지할 것들(continue)에 대해 알려준다.

재미있는 것은 내가 20여 년 회사 생활하면서 보아온 설문 결과에서 항상 빠짐없이 직원들이 가장 불만스러워하는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승진제도’에 관한 것이었다는 점이다. 내가 직원 입장으로 설문에 참여할 때도 그랬고, 내가 대표이사(General Manager)가 되어 직접 승진제도를 운영, 관리할 때도 그랬고, 내가 미국, 싱가포르 등 해외에서 일할 때도 그랬고, 내가 한국에서 일할 때도 그랬다. 그래서 이건 어디를 가나 있을 수밖에 없는 만국 공통의 불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모든 사람이 모두 자신이 원하는 타이밍에 승진이 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라면 말이다. 특히 내가 GM이 된 후 ‘모두가 납득할 수 있게 누구보다 공정하게 승진제도를 운영해 봐야지’라고 마음먹고 최선을 다했음에도 직원들로부터 여전히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게 되었을 때는 나도 어찌할 수 없는 한계를 느끼기도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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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진에서 누락이 되거나 경력개발이 본인의 생각처럼 이루어지지 않아 힘들어하는 사람들은 소위 말하는 ‘people decision (인사 결정)’이 회사 내에서 어떻게 일어나는지에 대해 이해할 수 있다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회사가 어떤 관점과 방식으로 승진제도를 바라보고 운영하는지 조금이나마 알게 되면 ‘나는 어떤 식으로 나의 승진(혹은 경력개발)을 준비할 수 있을까’에 대해 좀 더 구체적인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1. Performance
글로벌 기업들이 흔히 “People Strategy”라고 부르는, 인사관리 차원에서 시행하는 여러 가지 일들 중에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Performance Management’, 즉 연말 고과 등으로 대표되는 성과관리가 있고, 그 결과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받는 상여금(bonus) 혹은 인센티브(incentive)와 급여 인상률(merit increase)의 결정 등이 있다. 주어진 일을 열심히 잘하면 고과(performance rating)를 잘 받고, 그러면 인센티브나 연말 보너스도 잘 받고, 이듬해 급여 인상도 잘 받게 되는 식이다.

하지만 승진은 이보다 좀 더 복잡하다. 사실 좋은 업무성과(performance)는 승진을 위한 최소한의 기본적인 필요조건일 뿐이지 충분조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점을 간과하게 되면 ‘나는 이 일을 수년간 성실하게 잘 해 왔는데 왜 승진이 안 되는 건가?’라는 하소연을 하는 처지가 될 수 있다. 사실 냉정하게 이야기하자면 회사 입장에서는 특정업무를 잘 수행하고 있는 사람에게 보너스 잘 주고 임금인상을 잘해줄 필요는 있으나 굳이 승진을 시켜서 지금 잘하고 있는 일 말고 다른 새로운 일을 줄 필요는 없다. 실제로 내가 C사에 다닐 때는 입사 후 10년 가까이 줄곧 같은 업무만을 담당하고 있는 직원들도 주위에 많았는데, 일을 잘하는 직원일수록 회사는 그 일만을 계속 더 시키고자 하는 욕구가 높아진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나저나 나는 여기서 ‘동일한 업무를 하면서 승진이 일어나는 경우는 없다’는 전제하에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만약 같은 업무를 하면서도 연차가 차면 직급이 올라가는 연공서열식 조직인 경우라면 내 말이 적용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내가 아는 대부분의 글로벌 기업들의 경우에는 대체로 각각의 직무별로 그 일을 수행하는 사람에게 주어질 수 있는 직급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직무의 변경이 없는 한 승진은 원천적으로 힘들다고 보아야 한다. (굳이 직무의 큰 변화 없이 꼭 승진을 시켜야 할 예외적인 경우가 생기면 고육지책으로 직무의 변화가 있는 것처럼 Job Description(직무설명서)을 새롭게 작성하는 꼼수를 부릴 때도 없지는 않다.)

그러면 승진 결정에서는 현재 업무에서의 성과(performance) 외에 또 무엇이 중요하다는 말인가?

2. Potential

‘새로운 직무에서도 누군가가 잘할 수 있을지’, 더 엄밀하게는 ‘해당 직원이 현재 직무를 계속 잘 수행함으로써 회사에 공헌하는 기여의 크기보다 그가 새로운 직무에서 회사에 공헌할 수 있는 기여의 크기가 더 클 것인지’가 중요한 판단 요소라고 보아야 한다. 그런데 과연 이것을 어떻게 측정할 것인가?

이것은 정말 어려운 부분이다. ‘Performance’라는 것은 과거의 성과이기 때문에 비교적 객관적으로 평가가 가능하지만, 그 사람이 새로운 직무를 맡았을 때 얼마나 성공적으로 새로운 업무를 빨리 습득하고 거기서도 의미 있는 성과를 낼 것인지는 어찌 보면 순전히 추측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추측(?)은 다수의 글로벌 회사가 대단히 중요하게 여기는 ‘인재관리(talent management)’의 핵심적인 부분이고, 그래서 많은 회사들이 나름의 방식으로 (대부분 비밀리에) 소위 말하는 직원들의 “potential(그릇의 크기?)”을 평가한다. 그리고 이를 승진을 포함하여 여러 가지 인사와 관련된 결정들에 참고한다.

직원의 Potential을 평가하는 방법은 회사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대체로 새로운 것을 빠르게 학습하는 능력, 호기심, 복잡한 문제의 본질에 한걸음 더 들어가는 능력, 다양한 상황에 대해 예측하고 대비하는 능력, 자신의 장단점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끊임없이 발전을 추구하는 성향, 다른 사람의 지적에 얼마나 긍정적으로 반응하는지, 남들에게도 문제 해결을 위해 건설적인 도움을 적극적으로 주는지 등등의 여러 가지 정성적인 요소들에 대한 평가를 종합해서 하게 된다. 영어 표현을 빌리자면 “It’s more of an art than a science (과학이라기보다는 예술에 가깝다)”라고도 할 수 있는데 쉽게 말해서 평가하는 방식에 딱 부러지는 정답이 없다는 얘기다. 그런 만큼 평가하는 사람의 주관이 많이 반영될 소지가 크다고도 볼 수 있다.

3. Opportunity

고성과자(High Performer)이면서 잠재력도 높다고 평가받는 소위 ‘하이포 (High Potential Talent)’인 경우에는 회사 내에서 기대할 수 있는 승진 혹은 경력개발 기회의 범위가 넓어진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것이지 그 자체로 아무것도 보장되는 것은 없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그 사람에게 맞는 새로운 역할 혹은 기존에 수행하던 직무를 더 확대할 수 있는 기회 등이 생기지 않으면 가능성은 가능성으로만 남을 뿐 현실은 별반 변화가 없을 수 있기 때문이다.

회사가 계속 성장할 때에는 이런 기회가 비교적 자주 생긴다. 하지만 회사의 성장이 정체되거나 심지어 조직 및 인원의 감축이 일어나는 상황에서는 이런 기회가 오매불망 기다려도 안 올 수도 있다. 실제 내 주위에는 소위 말하는 자타공인 top talent 임에도 회사를 떠나는 사람들도 많았는데 이런 이유 때문인 경우가 많았다. (아이러니하게도 많은 사람들이 회사를 떠나는 시기에는 그 공백을 메우기 위해 남아있는 사람들에게 다양한 기회의 문이 열리기도 한다.)

4. Advocate

업무성과도 좋고 (High Performance), 그릇의 크기도 크다고 인정받고 (High Potential), 주위에 좋은 기회(Opportunity)도 심심찮게 생겨나고 있다면 삼박자가 다 갖춰진 셈이다. 그런데도 좀처럼 승진 혹은 새로운 기회를 잡지 못하는 사람들이 간혹 있다. 예전에 함께 일했던 동료 한 명이 그런 대표적인 경우였는데, 어느 날 그가 나에게 조용히 상담을 하고 싶다고 찾아왔다.

그의 고민을 듣고 나서 내가 물었다.

“OO님의 성과나 역량에 대해서 회사 내에 어떤 분들이 알고 계시나요?”

“그리고 그분들은 OO님이 어떤 식으로 경력을 개발하기 원하는지는 얼마나 알고 있나요?”

그가 대답했다.

“글쎄요. 딱히 다른 분들께 저에 대해서 이야기해 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어요.”

그리고는 내가 누군가에게 이런 비슷한 질문을 할 때마다 무척 자주 듣는 표현을 덧붙인다.

“사실 저는 show off 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요. 그리고 저는 체질적으로 윗사람에게 아부도 잘 못하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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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랑하다’, ‘과시하다’라는 뜻이 담긴 ‘show off’를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에 사용하는 사람들은 ‘겸손의 미덕’을 중시하는, 어쩌면 전형적인 한국인이라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비슷한 주제를 놓고 외국인 동료들과 이야기했을 경우 한 번도 ‘나는 show off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류의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별 것 아닌 것을 대단한 일이라도 한 것처럼 부풀려 이야기하는 것은 분명 바람직하지 않고, 그렇게 했다가 오히려 해가 되기 십상일 수도 있다. 하지만 자신의 성과를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있는 그대로 남들이 인지할 수 있게끔 하려는 것을 ‘show off 하는 것’이라고 폄훼해서는 안된다. 한국의 많은 인재들은 지나친 겸손 때문에 이런 측면에서 다른 나라 인재들에 비해 그 가치가 현저하게 덜 알려지고 그로 인해 종종 저평가되는 경우를 자주 보았다.

그리고 자신의 성과를 기회 있을 때 정당하게 알리는 것과 더불어서 자신이 어떤 경력개발을 계획하고 있는지도 남들에게, 특히 주위의 상사 및 내부 관계자(stakeholder)들에게 당당하게 이야기할 줄 알아야 한다. 이것을 ‘아부’의 일환으로 착각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이를 등한시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무책임한 사람이다. 내가 나를 옹호하지 않으면서 다른 누군가가 나를 알아서 옹호해주기를 기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가족간에도 표현하지 않으면 모르는 경우가 허다한데 하물며 직장에서야 더 말할 것도 없지 않을까?

“People discussion”이라고 부르는 인사와 관련된 거의 모든 논의들은 놀랍게도 논의의 대상이 되는 사람을 아는 단 몇 사람의 의견이 큰 영향을 끼치곤 한다. 그것이 긍정적이건 부정적이건 소수의 의견이 마치 다수를 반영하는 것과 같은 효과를 내는 ‘The Law of Small Numbers”라는 것이 “people decision”에서 종종 극명하게 나타나는 것을 나는 여러 번 보았다. 결국 그만큼 나를 아는 사람, 그리고 나를 옹호해 줄 수 있는 사람, 즉 나의 “Advocate”이 있는가 없는가는 많은 경우 나와 관련된 회사의 의사결정에서 큰 차이를 만들게 된다.

그러다 보니 ‘내가 그저 묵묵히 열심히 일하고 있으면 언젠가 회사가 알아서 나를 대접해 주겠지’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생각보다 오랫동안 제대로 된 대우를 받지 못하다가 회사에 서운함을 느끼게 될 가능성이 크다. 안타까운 일이긴 하지만 자신의 책임은 전혀 없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자신의 운명에 대한 칼자루를 온전히 남에게 쥐어주면서 정작 본인이 할 수 있는 일에는 소극적이었던 것은 아닐까?

***

간혹 ‘그 회사는 직원들 경력개발을 잘 시켜주나요?’라고 묻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그들에게 대답한다.

“경력을 잘 개발시켜주는 회사는 없어요. 스스로 경력개발을 하기에 유리한 환경이 갖춰진 회사는 있지만.”

차이는 주도권을 누가 쥐는가이다. You have to OWN your own career development. 경력개발은 본인이 주도해야 한다.

(2020년 1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