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도 이제 한 달 남았다. 전 세계가 코로나(COVID-19)에 얼룩진 정말 특이한 한 해였다. 개인적으로는 20여 년 이상의 안정된 직장생활을 뒤로하고 새로운 도전에 나선 첫해이기도 했다. 스타트업(Startup)에 입문한 것이다! 그리고 번개같이 흘러간 지난 1년….

올 한 해를 돌이켜보면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키워드는 ‘전화위복(轉禍爲福)’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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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월. 글로벌 바이오텍 기업 C사의 한국지사 대표로 근무하며 새해 첫 업무를 시작하다가 우리 회사가 다른 회사에 팔렸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다. 당황스럽기 그지없었다. 우리 직원들에게, 그리고 나에게 앞으로 어떤 일이 닥칠지 수천 가지 질문들이 폭풍처럼 머릿속에 회오리쳤다. 그 모든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아내고, 그 내용을 직원들에게 설명하고, 피할 수 없을 조직의 동요를 최소화하고, 그 와중에 사업의 동력을 어떻게든 유지해야 하는 책임이 무겁게 어깨를 짓눌렀다.

본사 차원의 인수합병이 완료되려면 1년여의 시간이 걸리고 그 이후에 지사의 통합에도 또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알게 된 다음에는 어떻게 하면 남아있는 기간 동안 조직이 와해되지 않고 직원들의 사기가 떨어지지 않게 할 수 있을지 골머리를 싸맸다. 고맙게도 우리 직원들은 불안함 속에서도 서로를 격려하며 똘똘 뭉쳐주었고, 회사는 안정적으로 계속 성장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그러던 중에 운명처럼 지금의 회사를 알게 되었다. 나를 잘 아는 친구를 통해서였다.

뭐? 벤처회사?

내가 약대를 졸업하고 신약개발의 꿈을 품은 연구원으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을 당시에는 한국에 제약/바이오벤처 업계가 아직 태동기였다. 그러다가 2000년대 초반에 바이오벤처 붐이 일면서 함께 일하던 동료 연구원들이 우르르 벤처로 떠나갔다. 그들의 행보를 보며 ‘회사에 이대로 남아있다가 혼자 바보가 되는 것은 아닐까?’라는 고민도 잠깐 했었다. 하지만 그게 다였다. 나는 대기업 C사에 남아 연구원으로 몇 년을 더 일한 뒤에 미국으로 떠났고, 거기서 진짜 제대로 신약개발을 하는 세계적인 제약회사에서 경험을 쌓겠노라고 마음먹었었다. 그리고 운 좋게도 그 이후 15년을 소위 글로벌 ‘빅파마 (Big Pharma)’와 ‘빅 바이오텍 (Big Biotech)’에서 일할 수 있었다.

이래저래 외국 생활을 하다가 2018년에 한국에 다시 돌아와서 보니 그동안 바이오벤처 업계는 많이 달라져있었다. 우선 전혀 벤처에 있을 것 같지 않던 능력자 지인들 몇몇이 바이오벤처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 흥미로웠다. 하지만 여전히 나 자신이 여기에 뛰어들 가능성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조차 해 보지 않았다. 우선, 번듯하고 안정적인 기업을 굳이 박차고 나가서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 않았고 (아직 애들 다 키우려면 한참 멀었으니깐), 또 신약을 개발한다는 것이 얼마나 막대한 자본과 긴 시간을 투입해야 하는지, 그러고도 얼마나 성공 가능성이 낮은 지를 잘 알기 때문에 아직 한국의 바이오벤처가 그런 일을 해 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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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은 늘 무언가 하나라도 새로운 것을 배울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그래서 바이오벤처 I사의 대표님을 친구 소개로 처음 만났을 때도 그저 어떤 분인지, 혹시 뭘 배울만 한 게 있을지 알아보기 위한 (소위 ‘get to know’ 하기 위한) 자리로 부담 없이 생각했다. 한국의 바이오벤처라는 곳이 어떠한 수준인지, 또 어떻게 굴러가는지가 궁금하기도 했고.

첫 만남은 무척 신선했다. 대표님은 생각보다 더 점잖고 순수해 보이는 분이셨고 그분이 들려주는 당신이 살아온 이야기며 앞으로 꿈꾸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 속에는 공감 가는 것들도 많았다. 즐거운 대화 덕분에 다시 한번 시간이 되면 만나자는 그분의 제안에 흔쾌히 그러겠노라고 했다.

그리고 다시 일상으로 복귀했다. 피인수를 앞둔 우리 회사의 상황은 하루하루가 긴장의 연속이었지만, 직원들을 다독이고 똘똘 뭉쳐서 계속 좋은 성과를 내는데서 오는 즐거움도 나름대로 컸다. 그리고 그 덕분인지, 주변에서는 우리 회사의 인수가 완료되더라도 통합된 법인의 대표에 내가 선임될 가능성이 높다는 이야기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별로 기대를 않던 나도 나중에는 점점 욕심이 나기 시작했다. 사실 우리 직원들에게는 회사의 인수합병 소식이 있은 직후에 내가 합병법인의 대표에 도전할 것이고, 실력으로는 자신이 있다고 해둔 터였다. 우리 직원들이 밖에 나가서 기죽고 다니게 하고 싶지 않아서 내 나름대로 허세를 부려본 것이었다. 하지만 인수를 당하는 입장에서 그 가능성이 그리 높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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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처회사의 대표님은 그 뒤로도 가끔씩 연락을 주셨고, 시간이 되면 함께 밥도 먹고 차도 마시게 되었다. 만남이 거듭되고 당신의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점점 그분과 함께 벤처에서 일해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고, 그래서 가더라도 많이 헤맬 것이라는 생각이 오히려 왠지 묘하게 짜릿함을 주는 듯했다. 그리고 급기야 언제부터인가 갈등하는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만약에 내가 합병법인 대표에 선임이 되면 어떻게 해야 하지? 수락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그런 고민을 한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변화였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사실 그것은 전혀 고민의 대상조차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국적 기업의 대표 자리에서 계속 일하게 된다면 당연히 보수도 훨씬 더 높고, 회사도 훨씬 더 안정적이고, 남들 보기에도 훨씬 더 그럴 듯 해 보일 것이니 말이다. 그리고 글로벌 기업의 한국법인 대표라는 것은 내가 여태 해 오던 일이니 이미 익숙하고 잘 하는 일을 계속하는 것인만큼 부담도 없다.

하지만 ‘이미 익숙하고 잘하는 일을 계속하는 것’은 반대로 말하면, 새로운 것에 도전하며 배우고 성장할 수 있는 기회가 그만큼 적다는 뜻이다. ‘만약에 내가 합병법인의 대표에 선임이 되면? 그 자리를 수락하는 것이 누구나 생각하듯이 너무도 당연한 선택일까? 행여나 시인 Frost가 노래한 <The Road Not Taken>처럼 ‘가지 않은 길’을 뒤돌아보며 계속 ‘만일 내가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What if)?’하고 되묻게 되지는 않을까?’

합병법인의 선임에 대한 결정이 임박할수록 나의 갈등도 깊어만 갔다.

어떻게 해야 하지? 어떤 결정을 해야 나중에 덜 후회하게 될까?

다행히도 나의 김칫국은 김칫국으로 끝이 났다. 합병법인의 대표는 인수당하는 기업인 우리 회사가 아니라 인수하는 기업 쪽 후보자로 최종 선임이 된 것이다. 주변 사람들은 크게 실망하며 나에게 위로의 말을 건넸지만, 나는 속으로 참 잘되었다고 생각했다. 더 이상 고민할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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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트업에 합류하고 보낸 지난 1년여 시간은 나의 20여 년 직장생활에서 가장 신나게 일한 시기이다. 내가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들이 이곳 스타트업에는 없는 것 투성이고, 그만큼 내가 기여할 수 있는 부분들이 많다. 반대로 이곳 스타트업에서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은 내가 모르는 것 투성이고, 그만큼 내가 배워야 할 부분들도 많다. 대개의 경우 내가 겪는 일종의 문화충격은 ‘옳고 그름’의 문제인 경우보다 ‘다름’의 문제인 경우가 대부분이고, 그런 만큼 유연하게 생각하고 빨리 배우고 과감하게 행동해야 한다.

생각해보니 나는 여태껏 한 번도 내가 몸 담았던 직장을 내발로 걸어 나간 적이 없다. 어딘가에 한번 들어가면 등 떠밀려 쫓겨날 때까지 나가지 않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첫 직장에서는 연구소의 구조조정으로 퇴사하게 되었고 (미국에서 회사 지원으로 MBA를 하던 중이었다), 두 번째 직장에서도 글로벌 구조조정으로 동남아 지사들이 통폐합되면서 자리를 잃었다 (싱가포르/말레이시아에서 법인 대표로 일하고 있던 때였다). 그리고 이번에도 회사가 인수합병되면서 회사를 나오게  되었다. 지지리 복도 없다.

하지만 위기는 항상 나에게 새로운 기회의 문을 열어주었고, 이번에는 스타트업이다. 일단 여기에 한번 온 이상 이번에도 여기서 끝을 볼 생각이다. 쉽지 않겠지만 스타트업에 몸 담게 되어서 행복하다. (아무 스타트업이 아니라 우리 회사라서 더 그렇다. ^^)

한때 층층시하 밑에서 실권은 거의 없는 글로벌 회사의 지사장보다는, 작더라도 정말 내 소신대로 회사를 경영할 수 있는 기회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던 적이 있다. 눈 떠보니 지금 그렇게 되어 있다. 진짜 꿈은 이루어지나 보다. 이제 꿈을 현실로 만들어야징.

(2020년 11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