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트업으로 자리를 옮기고 나서 많은 것을 새로 배우고 있다. 나름 제약 바이오 업계에서 이것저것 두루 경험해보았다고 생각했지만 벤처 회사에 와서 경험하는 것은 온통 새로운 것 투성이다. 새로운 경험은 항상 신기하고 신난다.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것이 투자 유치다. 다국적 기업의 한국법인 대표로 일할 때에야 투자자를 만날 일도, 투자 유치를 할 필요도 없었기 때문이다.

투자자들을 만나서 이야기하다 보면 자주 오르내리는 주제 중의 하나는 기업가치에 관한 것이다.

“그래서… 회사의 value를 어느 정도로 생각하시나요?”

투자를 한다는 건 그 회사의 일부를 ‘산다’는 의미이기도 하므로, 당연히 ‘가격’이 필요하다. 투자하려고 하는 회사와 투자를 받으려고 하는 회사가 우리 기업의 가치, 즉 가격에 대해 서로 눈높이가 맞아야 투자가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벤처회사의 기업가치라는 것은 참 애매하다. 내가 몸 담았던 글로벌 제약사 Celgene은 100조 원 가까운 금액에 BMS에 인수 합병되었고(제약산업 역사상 최대 규모였다), Eli Lilly는 요즘 몸값이 200조 원이 넘으면서 잘 나가고 있다. 하지만 이들 글로벌 상장기업들의 ‘가치’가 비교적 객관적으로 계산 가능한 것과 달리, 바이오벤처의 경우에는 당장 눈에 보이는 매출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우리 회사처럼 아직 주식이 상장되지 않았을 경우 보편적으로 거래 가능한 주가가 있는 것도 아니다 보니 회사의 가치를 매기기가 간단치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치 산정은 꼭 필요한 것이므로 여러 가지 요소들을 이렇게 저렇게 고려하게 되는데 사실 어떤 방법을 쓰더라도 그 값이 다분히 주관적인 것은 어쩔 수가 없다. 그러다보니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혹은 평가하는 투자자에 따라 생각하는 기업가치도 의견이 분분할 수 있다.

문득 드라마 <가을동화>에서 원빈이 했던 유명한 대사가 생각난다…

“돈으로 사겠어… 얼마면 돼?”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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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도전을 위해 MBA란 걸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오랜 준비 끝에 healthcare에 특화된 프로그램을 가진 학교들에 지원했었다. 최고의 학교부터 나름 안전빵(?)이라고 생각했던 학교까지 비교적 다양하게 응시했는데, 합격자 발표가 시작되고 나서 지원했던 학교에서 줄줄이 “ding”(불합격 통보)을 받기 시작했다. 심지어 안전권이라고 생각했던 학교들에서도 ding을 받고 나자 나는 나 자신에 대한 엄청난 실망과 함께 ‘내가 스스로를 대단히 과대평가하고 있었나 보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다행히 나중에 내가 제일 가고 싶었던 학교에서 합격통지를 받고 나서야 그 생각은 ‘내가 모자라서’가 아니라 ‘나와 fit이 맞지 않아서였구나’로 바뀌었다.

MBA를 하면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Job search를 할 때 나는 미국에서 직장 경험을 쌓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 미국에서 시민권이 없는 외국인 학생이 현지 취업하는 기회를 얻기란 쉽지 않았다. 여러 회사에 지원을 했지만 번번이 탈락했다. 학교가 유명해봐야 나한테는 별 도움이 안 되는구나 싶어 실망스러웠다. 반면에 미국인 친구들은 Wall Street의 글로벌 금융사, 세계적인 컨설팅회사, Silicon Valley의 IT 기업 등에 척척 붙어서 여러 개의 회사 가운데 어디를 선택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나는 심리적으로 엄청나게 위축되었다. ‘하긴 쟤들은 하버드, 스탠퍼드 등 최고의 대학을 나오고 최고의 회사들에서 경험을 쌓다가 여기 왔잖아. 어쩌면 애당초 내가 쟤들 틈에 낄 수준이 아니었던 건지도 몰라.’ 한번 의기소침해지기 시작한 내 마음은 나 자신의 가치에 대해 더 가혹하게 스스로 깎아내렸었다.

오래된 손목시계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어떤 사람이 낡고 보잘것없어 보이는 오래된 시계를 길가의 시계 상점에 갖고 가서 물었더니 5달러 정도면 사겠다고 하더란다. 그런데 같은 시계를 박물관에 가져갔더니 이건 백만 달러 이상의 가치가 있는 귀한 물건이라고 하더란다. “Know Your Worth (당신의 가치를 알라)”라는 제목이 붙은 이 글의 교훈은, 자신을 폄훼하는 남들의 시선에만 자기 스스로에 대한 평가를 맡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회사 혹은 개인에 대해 가치를 매긴다는 것은 그 대상이 지닌 본질이 100% 반영되는 것이라기보다는, 그 본질이 처해져 있는 환경 혹은 그 본질을 바라보는 관점이 함께 반영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아무리 진귀한 시계라도 그것을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낡은 고물에 불과한 것처럼… 공식으로 표현하자면 이런 식이다.

가치(Value) = 본질(Substance) X [관점(Perspective) 혹은 환경(Environment)]

결국 나의 가치를 높게 인정받으려면, (A) 나의 본질적인 가치를 높이기 위해 더 노력하거나 혹은 (B) 나를 바라보는 관점 혹은 환경을 바꾸어야 한다. 회사에서 내가 인정받지 못하면 내 실력을 향상하기 위해 노력하기도 해야 하지만, 내가 부당하게 대우받고 있으면 그 회사가 나와 fit이 안 맞는 것이니 다른 환경을 찾아보는 것이 필요할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 회사가 제대로 기업가치를 인정받으려면 회사의 본질적인 가치를 높이기 위해 부단히 애써야 하지만, 우리 회사를 폄훼하거나 우리의 비전에 공감하지 못하는 투자자와는 애초에 손을 잡지 않는 것이 옳기도 하다.

안타까운 실수 중의 하나는 일부 사람들의 ‘관점(perspective)’에서 나의 ‘가치(value)’가 낮게 평가될 때, 그 원인을 단순히 내 ‘본질(substance)’에서만 찾으려고 하는 경우다. 물론 그 반대로 남의 관점이나 환경 탓만 하는 것도 곤란하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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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ck Swan: The Impact of the Highly Improbable>이라는 책으로 잘 알려진 저명한 저술가이자 투자자였던 Nassim Taleb은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생각했던 일이 현실에서 일어나서 엄청난 결과를 낳는 것, 그리고 지나고 나서 돌이켜보면 그 사건이 불가능했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필연이었던 것처럼 보이는 현상을 “Black Swan”이라고 불렀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나 911 테러, 혹은 개인용 컴퓨터의 출현 등이 그런 범주에 들어간다.

세상에 없던 새로운 기술을 선보이며 큰 파장을 일으키는 벤처회사도 어찌 보면 일종의 Black Swan이다. 가장 최근의 예는 코로나 시국에 대박을 터뜨린 모더나(Moderna) 같은 회사가 아닐까? 모더나는 몸속에 존재하는 mRNA를 약으로 개발하겠다는 획기적인 발상으로 10년 전에 창업한 회사이다. mRNA의 존재가 알려진지는 무척 오래되었지만 그것이 워낙에 불안정한 탓에 mRNA 자체를 약으로 만들겠다는 것은 감히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그런데 모더나는 설립 된 지 10년이 다되도록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했고 급기야 일부 투자자들은 ‘이 회사 결국 이러다 망하는 거 아니야’라며 의심의 눈초리를 품었다고 한다. 하지만 불가능할 것만 같던 기술은 결국 현실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로 인해 결과적으로 인류에 커다란 도움을 주게 되었다. 그리고 이 회사의 기업가치는? 이 글을 쓰는 오늘 기준으로 1400억 달러, 자그마치 우리 돈으로 160조 원에 달하는 엄청난 규모다. ㅎㄷㄷ…

모더나의 객관적 성공은 모더나의 경영자와 과학자들이 그들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던 일부 외부 시각에 흔들리지 않고 본질에 계속 집중했기 때문일 것이다. 개인의 성장도, 기업의 성장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그런 점에서 Nassim Taleb이 책에서 말하는 이 한마디는 의미심장하다.

“Remember that you are a Black Swan. (기억하세요. 당신이 바로 Black Swan입니다.)”

검은 백조가 실제 있다는 것이 17세기 탐험가들에 의해 처음 세상에 알려지기 전까지 사람들은 아무도 그 존재를 믿지 않았지만, 검은 백조들은 그러거나 말거나 아랑곳 하지 않고 호주 서부에서 유유자적 잘 살고 있었다. 만일 자신이 Black Swan이라면 ‘이 세상에 Black Swan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회의론자들 때문에 너무 상처받지 말 일이다.

(2021년 7월)